오랜만에 날씨가 겨울답다. 물 묻은 손으로 작업장을 여는 순간 쩍 하고 문고리에 손이 달라붙는다. 이런 날씨는 어릴 적 밖에서 세수하고 방에 들어설 때 느껴보았던 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거실 큰 창으로 밖을 보니 감나무 가지가 심하게 흔들린다. 동장군의 기세는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없다.
남편이 한가한 겨울날을 택해 고질적인 허리를 수술했다. 수술하는 날 손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쉬울 거라던 수술이 길어졌고 막 병실로 들어서는 우리와 수술침대가 만났다. 남편의 얼굴은 축구공만 하게 부풀었고 심한통증으로 신음소리만 내었다. 그 모습을 본 손주녀석이 할아버지 죽는다고 통곡을 했다. 몇 주만 견디고 나면 훨씬 좋아질 거라 아이를 달래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남편만 남긴 채 집으로 왔다.
넓은 집에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다. 나도 6살 때 지금의 남편처럼 허리를 대수술 한 적이 있다. 보험도 없고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던 60년대 아버지는 딸 하나 살리려고 문전옥답 다 팔아 수술비를 마련했다. 아프다고 울며 보채던 어린 딸을 간호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야 느껴져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추운 날이 계속되니 밖의 수도가 꽁꽁 얼었다. 참새 몇 마리 전기 줄에서 재잘대는 한낮이 되어 나는 화선지를 꺼내들었다. 이런 날 봄을 기다리는 맘으로 매화를 그려볼 양이다. 그림엔 재주가 없어 감히 생각도 못했는데 서예교실 위층에 문인화 반이 개강되었다. 그림은 글씨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생동감이 있었다. 마치 날 위해 강좌가 개설 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림에 대한 목마름이 생기고 나서 나는 아예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굵고 묵은 둥치를 먹색으로 거칠게 표현하고 ,그 위에 새로 돋은 가지를 그려나간다. 꽂은 새 가지에서 피어난다. 마치 우리 인생처럼 나무도 가지를 위해 묵묵히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생명을 준다. 정적인 나무 가지에 동적으로 살아 있는 숨을 꽃으로 넣어보는 것이다. 겨울이 가려면 아직도 먼 것 같을 때 광양의 매실나무에 꽃눈 소식은 금방이라도 봄 이 왔음을 알려주지 않던가.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우리의 선조들은 선비의 기개를 말하고 군자를 상징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 선생은 강진에 오랜 유배시절에도 매화의 고결함에 매료되어 詩를 즐겨 쓰셨다. 매화 향기를 느끼며 詩를 짓고 경전을 탐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정약용의 매화삼수(梅化 三首) 후미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외장가구방소식 (猥將佳句方蘇軾)
어쩌다 얻은 멋진 시구 외람되이 소동파 에게 견주고
만파장경박정현(漫把殘經駁鄭玄)
경전 뒤적이며 하릴없이 정현을 반박하네
일수매화청사허(一樹梅化淸似許)
한 그루 매화가 이렇게도 맑기에
소향단좌백운변(燒香端座白雲邊)
향 사르고 흰 구름 가에 정좌하노라.
묵매의 커다란 둥치 사이로 가녀린 어린 가지를 달고 홍매로 담채를 표현할 것이다. 흰 종이 위에 붉은 꽃을 그려 넣으면 밖의 매서운 겨울 앞에 봄이 슬그머니 거실로 찾아온 듯 화사하다. 붉은 매화 끝에 눈발이 내려앉고 , 우수수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자연의 섭리.
생명이 꿈틀대는 봄을 기다리며 매화를 그리다.






매화나무의 기운이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