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중 유명한 곡들을 205곡 선정하여 에피소드와 해설을 담은 <Classic명곡 205>란 책을 냈지만
클래식 음악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흙속의 숨은 진주 같은 곡들이 많다.
이런 곡들은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난해 나온 <빵냄새가 나는 음악>이 이런 곡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러나 한정된 페이지에 더 소개하지 못한 숨은 좋은 곡들을 상세한 설명과 해설을 곁들여 올린다.
칼크브레너의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 칼크브레너의 한 지인은 칼크브레너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봉봉 과자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멘델스존도 그와 이따금 저녁 식사를 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팽은 그에 대하여 지금까지 들어본 중 누구보다도 뛰어난 음악가라고 칭송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칼크브레너는 누가 뭐라 하든 당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으며
1814년부터 1823년까지 런던과 파리에서 보낸 초기 10년간은 최고의 명성을 누렸고,
그곳에서 그는 피아노 제작자 플레옐의 확고한 후원자 중 한사람으로 음악 교사가 되어
여러 귀족들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칼크브레너는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는데 독일의 작곡가 겸 궁정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다른 것은 시키지 않고 음악 수업만을 혹독하게 시켰다.
그는 어머니가 여행 도중 카젤과 베를린의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났다.
5살 무렵에는 프러시아의 황제 앞에서 하이든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고
13살 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얼마 안 되어 피아노와 작곡 부분 두 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입은 나폴레옹 군의 장교가 되기를 갈망하고
강도 높은 검술과 승마 레슨을 받아 결국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로 임관이 되었으나
그 때는 나폴레옹 군이 틸시트 전투에서 대패하여 몰락의 길로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군에서 빼냈다.
칼크브레너의 다음 행선지는 비엔나였다.
그는 거기서 하이든과 알브레히츠베이거에게서 각각 작곡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훔멜과 가깝게 지내며 그와 함께 듀엣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1798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가 첫 공연이 될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음악사적으로 작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06년을 몇 개월 남기고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화려한 음악가 생활을 단념하고
그에 관한 자료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한 여인과 시골의 별장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가 곧 시골 생활에 흥미를 잃고 다시 음악가의 길을 택해 영국으로 항해를 할 때는
나폴레옹이 패배한 직후의 일이었다.
처음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10년 동안 그의 자만심은 극도로 커져서 그가 39세 때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찌할 수가 없는 속물이 되어 자신의 모든 욕구를 끝없이 채워나갔다.
칼크브레너가 스스로 잘 나가는 프로모터로 행세하고 있을 때 파리에 처음 온 21살의 쇼팽이
그에게 오디션을 보러 왔는데 칼크브레너는 쇼팽의 연주를 듣고는 정중한 호평을 하면서
자신에게서 3년 만 공부하면 쇼팽을 진정한 아티스트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쇼팽은 재치있게 거절한다.
멘델스존이 쇼팽은 이미 칼크브레너만큼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고 말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쇼팽은 칼크브레너의 피아니즘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E단조를 헌정한다.
쇼팽의 칼크브레너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한 것으로, 칼크브레너는 피아노의 완벽한 파가니니다
라고 한 말이다.
칼크브레너의 환상적인 터치와 음과 음 사이의 적막과 한결 같은 표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음 하나하나의 표현에 있어 거장이라고 했다.
그는 진정한 거인으로 모든 음악가들은 칼크브레너 앞에선 난장이가 되고,
쇼팽 자신은 칼크브레너의 연주를 들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했는데
칼크브레너가 쇼팽 자신을 위해 연주를 할 때 미스터치를 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그 것 조차
마술 같은 것이었다고 쇼팽은 말했다.
쇼팽보다 조금은 덜하지만 그에 대한 다른 호의적인 이야기도 있다.
멘델스존의 친구 페르디난드 힐러가 어느날 저녁 멘델스존의 집에서 있었던 칼크브레너의 우아한 그랜드 판타지아 연주에 대해 한 이야기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가 이 작품을 즉흥 연주를 해 줄 것을 요청하자
칼크브레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음표 하나 빠짐없이 연주를 했다.
다음날 멘델스존은 이 곡의 악보를 보고선 즉시 출판을 했는데 칼크브레너가 즉흥적으로 연주한 음표 그대로였다고 한다.
20년간 파리 사교계의 스타였고 조금 병약했던 이 뛰어난 피아니스트 칼크브레너는 1849년 프랑스 센에우아즈 주의 데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으론 4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몇 개의 실내악들, 그리고 여러 소나타들이 있다.
**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는 제시부로 오케스트라가 잠깐 등장하는데, 제시부는 길지 않는 튜티로 성급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앉아서 기다리다가 화려하게 시작을 하면서 이 콘체르토의 강력함을 예고하는 것이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교과서 같은 곡임을 암시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표현하는 방법보다 덜 중요한 것이어서 칼크브레너는 악기의 울림과 독주 연주자의 능숙한 표현을 교묘하게 조합하는데 중점을 둔다.
*** 한스 칸-피아니스트 한스 칸은 1927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946년 처음 콘서트에 참가한 그는 1948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음악공연대회에서 은 매달을 탔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한스는 유럽 전역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고, 카라얀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과 협연한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그는 도쿄의 동경예술대학에서 피아노반을 이끌면서 일본 전역을 순회하고 인도, 이란, 이스라엘과 터키에서 공연을 했다. 유럽으로 돌아와선 쾨르너 상을 받고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67년엔 다름슈타트에 있는 뮤직 아트 아카데미에서 피아노 상급반을 지도했다. 한스는 쾨르너 상을 한 번 더 닫은 후 동부지역을 여행하며 프로코피에프의 4번 째 협주곡인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포함 여러 유명한 곡들을 연주하고, 소련과 영국에서 한 번씩, 그리고 두 번째의 남아메리카 연주여행을 다녀왔다.
클래식 음악 중 유명한 곡들을 205곡 선정하여 에피소드와 해설을 담은 <Classic명곡 205>란 책을 냈지만
클래식 음악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흙속의 숨은 진주 같은 곡들이 많다.
이런 곡들은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난해 나온 <빵냄새가 나는 음악>이 이런 곡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러나 한정된 페이지에 더 소개하지 못한 숨은 좋은 곡들을 상세한 설명과 해설을 곁들여 올린다.
칼크브레너의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 칼크브레너의 한 지인은 칼크브레너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봉봉 과자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멘델스존도 그와 이따금 저녁 식사를 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팽은 그에 대하여 지금까지 들어본 중 누구보다도 뛰어난 음악가라고 칭송을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칼크브레너는 누가 뭐라 하든 당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으며
1814년부터 1823년까지 런던과 파리에서 보낸 초기 10년간은 최고의 명성을 누렸고,
그곳에서 그는 피아노 제작자 플레옐의 확고한 후원자 중 한사람으로 음악 교사가 되어
여러 귀족들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칼크브레너는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는데 독일의 작곡가 겸 궁정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다른 것은 시키지 않고 음악 수업만을 혹독하게 시켰다.
그는 어머니가 여행 도중 카젤과 베를린의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났다.
5살 무렵에는 프러시아의 황제 앞에서 하이든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고
13살 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얼마 안 되어 피아노와 작곡 부분 두 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입은 나폴레옹 군의 장교가 되기를 갈망하고
강도 높은 검술과 승마 레슨을 받아 결국 나폴레옹 군대의 장교로 임관이 되었으나
그 때는 나폴레옹 군이 틸시트 전투에서 대패하여 몰락의 길로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군에서 빼냈다.
칼크브레너의 다음 행선지는 비엔나였다.
그는 거기서 하이든과 알브레히츠베이거에게서 각각 작곡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훔멜과 가깝게 지내며 그와 함께 듀엣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1798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가 첫 공연이 될 때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음악사적으로 작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06년을 몇 개월 남기고 그는 파리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화려한 음악가 생활을 단념하고
그에 관한 자료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한 여인과 시골의 별장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가 곧 시골 생활에 흥미를 잃고 다시 음악가의 길을 택해 영국으로 항해를 할 때는
나폴레옹이 패배한 직후의 일이었다.
처음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10년 동안 그의 자만심은 극도로 커져서 그가 39세 때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찌할 수가 없는 속물이 되어 자신의 모든 욕구를 끝없이 채워나갔다.
칼크브레너가 스스로 잘 나가는 프로모터로 행세하고 있을 때 파리에 처음 온 21살의 쇼팽이
그에게 오디션을 보러 왔는데 칼크브레너는 쇼팽의 연주를 듣고는 정중한 호평을 하면서
자신에게서 3년 만 공부하면 쇼팽을 진정한 아티스트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쇼팽은 재치있게 거절한다.
멘델스존이 쇼팽은 이미 칼크브레너만큼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고 말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쇼팽은 칼크브레너의 피아니즘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자신의 피아노협주곡 E단조를 헌정한다.
쇼팽의 칼크브레너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한 것으로, 칼크브레너는 피아노의 완벽한 파가니니다
라고 한 말이다.
칼크브레너의 환상적인 터치와 음과 음 사이의 적막과 한결 같은 표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음 하나하나의 표현에 있어 거장이라고 했다.
그는 진정한 거인으로 모든 음악가들은 칼크브레너 앞에선 난장이가 되고,
쇼팽 자신은 칼크브레너의 연주를 들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했는데
칼크브레너가 쇼팽 자신을 위해 연주를 할 때 미스터치를 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그 것 조차
마술 같은 것이었다고 쇼팽은 말했다.
쇼팽보다 조금은 덜하지만 그에 대한 다른 호의적인 이야기도 있다.
멘델스존의 친구 페르디난드 힐러가 어느날 저녁 멘델스존의 집에서 있었던 칼크브레너의 우아한 그랜드 판타지아 연주에 대해 한 이야기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가 이 작품을 즉흥 연주를 해 줄 것을 요청하자
칼크브레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음표 하나 빠짐없이 연주를 했다.
다음날 멘델스존은 이 곡의 악보를 보고선 즉시 출판을 했는데 칼크브레너가 즉흥적으로 연주한 음표 그대로였다고 한다.
20년간 파리 사교계의 스타였고 조금 병약했던 이 뛰어난 피아니스트 칼크브레너는 1849년 프랑스 센에우아즈 주의 데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으론 4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몇 개의 실내악들, 그리고 여러 소나타들이 있다.
**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는 제시부로 오케스트라가 잠깐 등장하는데, 제시부는 길지 않는 튜티로 성급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앉아서 기다리다가 화려하게 시작을 하면서 이 콘체르토의 강력함을 예고하는 것이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를 위한 교과서 같은 곡임을 암시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표현하는 방법보다 덜 중요한 것이어서 칼크브레너는 악기의 울림과 독주 연주자의 능숙한 표현을 교묘하게 조합하는데 중점을 둔다.
*** 한스 칸-피아니스트 한스 칸은 1927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946년 처음 콘서트에 참가한 그는 1948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음악공연대회에서 은 매달을 탔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한스는 유럽 전역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고, 카라얀 등 여러 유명 지휘자들과 협연한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그는 도쿄의 동경예술대학에서 피아노반을 이끌면서 일본 전역을 순회하고 인도, 이란, 이스라엘과 터키에서 공연을 했다. 유럽으로 돌아와선 쾨르너 상을 받고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1962년부터 1967년엔 다름슈타트에 있는 뮤직 아트 아카데미에서 피아노 상급반을 지도했다. 한스는 쾨르너 상을 한 번 더 닫은 후 동부지역을 여행하며 프로코피에프의 4번 째 협주곡인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포함 여러 유명한 곡들을 연주하고, 소련과 영국에서 한 번씩, 그리고 두 번째의 남아메리카 연주여행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