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풍경

by nami posted Jul 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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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여름방학이다.

지난 몇 달간 사람들과 부딪히며

공허함에 빚진 시간을

세상의 외진 곳의 시간을 빌어다 갚고,

그래도 조금 남으면 서쪽으로 난,

우리 집의 유일한 문인 됫박만한

침실의 창문에 메어두고,

한밤중에 공연히 가슴이 콩닥거릴 때

달아나는 잠을 좇아간 시간의

대용으로도 쓰면 좋겠다 싶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조그만 역을

찾아 나선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열차를 탄다.

비가 오기 전에 상천역에 도착해야 한다.

상천역은 일제 강점기인 1939

간이역으로 태어나서 1967년에

보통역으로 승격되었으나

이용객이 줄어 1996년부터 여객을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2년부터 등산객과

M.T를 오는 대학생들이 늘어나며

다시 여객을 취급한다.

 

옛날 가평에 근무할 때 열차를 타고

지나가면 역보다 큰 역명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무것도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다가 열차가 구슬프게

기적을 울리며 모퉁이를 돌아가면

한 쪽이 허물어진 역사(驛舍)

슬래이브 지붕이 오랫동안 차창에 떠

있었는데지금도 나는 상천역을

그 커다란 역명판과

귀퉁이가 허물어진 지붕으로 기억한다.

[꾸미기]상천1.JPG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길은

이런 것인가.

하늘이 한 줄기 억센 빗줄기를 뿌린 후

온통 회색빛으로 덮힌 길은

완행열차의 바퀴 아래서 덜커덩거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희멀건 북한강도

내 아련한 기억을 따라 흐른다.

머릿속은 물풀이 자라 흐느적거리고

안개 자욱한 마음속 강물 위엔

물새들이 난다.

문득 물새 한 마리가 외로운 울음을

떨어뜨리고 열차도 빈 하늘에 목 쉰

기적소리를 울리며 긴 몸통을 흔든다.

 

사방에 보이는 것들은 내 기억이 극복할

대상은 아니다.

하나의 풍경을 없애면 또 다른 풍경이

밀려오고다시 밀려오는 풍경의 속도는

열차의 속도를 압도한다.

몸이 어떻게 흔들려야

풍경 뒤로 빠르게 흩어지는 추억들은

설레며 다시 길 안으로 모여드는 것인지,

나는 돌멩이처럼 깊은 생각에 잠긴다.

 

움직이는 것들이 하나씩 제 자취를

지워나가고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들도

제 흔적을 재빨리 지운다.

온 몸이 외로움인 물새와 가슴을 바꾸고,

길을 바꾸고 허공으로 울며 날아오른들

나의 길을 지울 수 있을까만,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나는 희미한 자취를 길 위에 남길 뿐이다.

 

-글 사진 배홍배 <풍경과 간이역>에서

 

[꾸미기]상천3.JPG